정건식건축사사무소 시절

1984-2001

 

  25년 간의 월급 생활을 마쳤다. 한국산업은행 생활이 군대 시절 포함 8년, 한국주택은행 생활이 10년 그리고 (주)대우건설 생활이 7년, 도합 25년이었다. 특히 (주)대우건설에서는 리비아에서의 생활이 반 이상을 차지하였다. 은행 생활은 갑(甲)의 생활이었고, (주)대우건설 생활은 을(乙)의 생활이었다면, 지금부터는 병(丙)의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갑 생활이란 을이나 병에게 베푸는 것이고,을 생활이란 갑에서 얻어 병에게 베푸는 것이고, 병 생활이란 갑이나 을에게서 항상 얻는 생활은 말하는 것이었다.

  1984년 7월 상협건축연구소의 일원으로 본격적인 병(丙)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사실 은행 생활에서 바로 건축설계사무소를 차리라고 권유를 받았지만 당시에는 독립할 자신이 없었다. (주)대우건설에서 을(乙)의 생활을 7년간이나 혹독하게 치렀기 때문에 건축사무소를 개설할 용기가 생긴 것이었다. 1년간의 합동사무소의 생활을 마치고, 마침 건축사 법이 바뀌면서, 주거 건물로 다세대 주택을 허용함에, 나 자신이 산업은행과 주택은행에서 18년간 익힌 소형 주택의 설계 및 감리의 경험을 바탕으로, 독립하여 단독 사무소를 열게 되었다.

 

   1985년 7월 서울시 도봉구 공능동에 있는 오산빌딩 2층에 정건식건축사사무소를 열었다.  2,000만원을 주택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임대 보증금, 집기류 및 유동자금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우선 직원은 건축설계 기사 1명과 여 직원 1명으로 시작했다. 위의 진은 사무소 외부와 내부인데, 처음이라 썰렁한 분위기였다. 당시는 행정구역상 공능동이 도봉구에 속하고, 구청은 수유동의 현재 강북구청이었다. 언제인가는 행정구역이 갈라질 것을 예상하고, 공능동에 첫 건축사사무소를 개설한 것이었다.

  "첫 술에 배 부르랴!"는 속담처럼, 몇 년 간은 사무소 유지를 겨우 할 정도의 수입밖에 안되었다. 건축사사무소를 대학 졸업시부터 운영하여 온 친구의 "10년은 되야 한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소형 건축물의 설계와 감리를 교환 감리로 하기 시작하면서, 제대로 받지도 못 했던 감리비를 제대로 받게 되어, 그 수입이 흑자 계정으로 돌아서는 계기가 되었다.

  1987년 1년간을 서울시 도봉구 감리단의 단장직을 맡으면서, 감리단 건축사들과 합심하여, 감리 업무의 철저하고 신속한 처리로, 아무런 민원도 없이  1년을 잘 지냈다. 물론 사무소의 수입도 완전한 흑자로 돌아서, 사무소 운영의 재미도 보고, 융자금도 완전히 상환했다.

  1987년 10월 28일 서울시건축사 회장으로부터 감리단 운영의 공로로 공로패도 받았다.

 

  1987년 2월 연호는 고등학교를, 연의는 중학교를 졸업했다. 사무소 운영도 현상 유지에서 완전히 흑자로 돌아선 때이라, 아들, 딸의 졸업을 여유있게 축하 할 수가 있었다. 연호는 재수를 기숙 학원에서 하기로 했고, 연의는 대일외국어고등학교에 응시 합격하여, 서반어과에 입학했다.

 

  연호가 재수하는 동안에 아빠인 내게 보낸 편지이다. 기숙 학원의 열악한 환경에서도 나름대로 열심히 하겠다는 의지를 아빠에게 보여 주는 글인 것이다.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의 심정을 읽을 수 있고, 약한 마음을 알 수가 있었다. 연호가 사준 구두는 바꾸지 않고, 오래 동안 신어, 낡았지만, 지금도 신발장에 보관하고 있다.

 

 

  연호가 기숙학원에서 1년간의 재수 끝에 서강대학교 철학과에 합격하였다. 그 기쁨을 함께 하기 위하여, 1988년 2월 16일 입학식에, 온 가족이 참석하여, 대학생이 된 아들의 그 간의 노력을 치하하고, 명문 대하교의 입학을  진심으로 축하했다. 연호가 입학 시험의 면접에서 철학과를 지원한 이유에 대하여, 그 어려운 예술 철학인 미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했다. 아마도 할아버지의 그 예술 혼이 연호에게도 흐르는 것같았다. 연호가 대학 생활을 시작하며, 동호회 활동으로는 합창 동호회에 가입하여, 그 어려운 미학 공부의 길을 다져 나갔으리라고 우리 가족은 생각했다.

 

 

 

 1988년 6월 1일 도봉구가 분구가 되어 노원구가 새로 생겼다. 상계동에 구청이 새로 들어 섬에 따라 1988년 5월에 사무소를 상계동의 상미 빌딩 301호로 옮겼다. 새로 생긴 노원구의 제1호로 등록이 됨과 동시에 서울시건축사협회 노원 분소 회장으로 위촉이 되어, 1988년 6월 10일 노원 분소 현판식을 가졌다. 건축사의 숫자가 가장 적은 분소이지만 도서 등록을 비롯하여 협회의 행정 업무를 모두 처리 할 수 있다고 주장한 끝에 얻은 분소인 것이었다. 분소 개업식에는 여러 건축사들 께서 참석하시어  축하해 주셨다.

 

  소형건축물의 교환 감리가 정착됨에 따라 소수의 노원구 건축사사무소의 수지도 좋은 편으로, 열심히 사무소 운영에 임했다. 우리 사무소도 그 동안 직원 수도 늘고 사무소의 크기도 넓어졌다. 조 실장을 비롯하여, 이 과장, 윤 대리, 기사, 조 양과 감리사무소 직원인 박 양이 1991년 1월 3일 시무식을 마치고, 남긴 사진과, 당시의 사무소 내부 사진이다.

 

  최초 노원 건축사 5인이 1991년 6월 5일에 건축사 친목회의를 마치고 수락산 근처의 식당에서 점심 식사 후 주위를 산책했다.  왼쪽부터 손우현 건축사, 권택부 건축사, 본인, 한완수 건축사님 및 이상철 건축사님이 시다. 서울에서 제일 적은 수의 건축사가의 노원분소 이지만, 그 운영은 다른 어떤 구보다도 공정하고, 합리적이었다. 노원 분소의 보유금액도 많았고, 가족적인 분위기로 운영이 되기 때문에 수시로 건축사 상호간의 정보 교환 및 협조가 잘 되었다.

 

  1992년 노원구 청사가 새 청사로 이사함에 따라 사무소를 구청 인근의 태성 빌딩 301호로 이전했다. 당시만 해도 새 노원구청 인근에는 적당한 사무소 건물이 많지 않아 태성 빌딩은 뛰어난 건물이었다. 아직도 공터가 많이 남아있는 상업 지역이 많았는데, 노원 구청이 들어선 이후 3, 4년내에 그 주위가 새 건물로 채워졌다. 건물의 외부에 한문으로 된 로고의 간판을 건물 외벽에 부착했다. 사무소 내주에는 1992년 말에 받은 많은  연하장을 천장에 달아 놓았다.

 

 

  사무소 운영이 잘 되니, 자연이 직원들에 대한 배려가 좋을 수밖에 없었다. 1993년 12월 28일 사무소의 종무식을 마치고, 망년회를 저녁 식사로 하고, 2차로 상계동의 유명한 나이트 클럽에서 즐겼다. 직원들이 가족과 같은 기분으로 근무하는 것이 우리 사무소의 분위기였다. 그러다 보니 총각 및 처녀 직원은 결혼하는 것은 물론 그들의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거처 중학생이 될 때까지 연속하여 근무하는 직원이 많았다. 가끔 사무소로 놀러 온 직원의 아이들에게 용돈을 집어 주는 것은, 마치 내 친 손자나 손녀에게 용돈을 주며 흐뭇해 하는 할아버지의 기분이었다.

 

  1994년 1월 1일부터 소형 건축물에 대한 교환 감리 제도가 폐지되고, 감리 업무도 설계자가 직접함에 따라 실제로 감리비를 받지 못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또한 변두리 집 장사들은 어떻게 하던지 규정보다 더 크게 지으려는 근성 때문에, 설계를 한 건축사가 감리를 제대로 할 수가 없는 경우가 생겨, 영업 정지등 행정 처분을 받는 수가 많았다. 사실 설계비를 받은 건축사가 건축주의 위법을 고발하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마치 기업의 회계 감사를 맡은 회계사가 그 기업에서 감사비를 받으며, 그 기업의 부정 회계를 적발하고도 감사 보고서에 제대로 반영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감리비를 제대로 받지 못함과 동시에 설계 수주를 위한 경쟁이 심하여 짐에, 사무소의 수입이 점점 줄어 들어, 원가 절감의 차원에서 구조 조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경영의 흑자는커녕 현상 유지를 위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때에 IMF 사태를 맞게 되었다. 다시 강력한 구조 조정이 필요했다. 사무소에서는 계획 설계만하고, 실시 설계는 외주를 주는 방식으로 운영 체계를 바꾸었다. 자연이 사무소의 규모와 직원 수를 최소한으로 유지하게 되었다. 그렇게 사무소를 계속 유지하며 몇 년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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