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대우건설 시절

1977-1984

 

  1977년 4월 25일 대우개발주식회사의 기획실장으로 발령을 받아, 그 날부터 출근을 했다. 사실 그 전에 한국주택은행 기술부장이신 한정섭 부장님의 추천으로 새로 설립되는 삼성건설 회장님의 면접을 마치고, 또 대학동기인 김영훈군의 추천으로 미륭건설의 회장님을 면접한 상태에서, 가족회의에서는 새로  설립되는 삼성 쪽으로 기울어 졌었는데, 당시 대학 동문인 대우개발주식회사 설립의 주역이었던 홍성부 전무의 강력한 요청으로 대우인이 되었다.

 

 

 

 

  대우개발주식회사의 첫 기획실장으로 매일 오전 6시에 출근하여 책임자 회의로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오전 9시까지 출근하던 전 직장의 출근 시간에 비하면, 아주 이른 시간이라 아침 식사를 제대로 못하여, 대우 센터 지하에 있는 일본식 국수 집에서 메밀 우동으로 해결하는 날이 많았다. 첫 월급을 받아 보니, 전 직장의 두 배의 금액이 였는데, 일은 세 배나 열심히 하여야 했다. 처음 기획실에서 한 일은 주식공개 업무였는데, 그 해 6월 30일 까지 공개 업무를 기획실 및 전산실 직원들이 밤을 세워가며 무사히 마치고, 우리사 주도 넉넉히 받았다.

  기획실장을 후임자에게 물려주고, 호텔 건설본부의 프로젝트 매니저로서, Seoul Hilton호텔 건설의 기본 기획 등을 맡아, 1978년 3월 호텔의 기본 설계를 가지고, 미국 뉴욕 Manhattan의 Waldorf Astoria 호텔에서 Hilton International의 기술팀과 회의를 하기 위하여 미국으로 출장을 가게 되었는데, 우리 기술팀은 미국 L.A.의 Bonaventure 호텔에서 일박을 하고, Chicago의 Conrad Hilton호텔에서 호텔의기본 설계를 담당하신

일리노이주립 대학교 건축과의 김종성교수와 합류, 회의 자료를 검토 후 뉴욕으로 가서 Waldorf Astoria 호텔에 투숙, 며칠간의 Technical Meeting을 그 호텔의 19층 회의실에서 성공적으로 마쳤다. 회의를 마친 날 마침 뉴욕에 살고 계셨던 작은 누님께서 호텔로 찾아 오셔서는 어떻게 이 호텔에 투숙하게 되었는지 놀라시는 것이었다. 하기야 Waldorf Astoria 호텔은 각 국의 원수가 주로 투숙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호텔로, 감히 일반인은 투숙 예약을 할 수 없는 호텔이기 때문이었다. 돌아 오는 길에도 출장을 갈 때와 마찬가지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호텔에서 투숙하며, 호텔의 기술적인 점들을 실지로 검토했다.L.A에서는 Bonaventure 호텔, Chicago에서는 Conrad Hilton호텔, 뉴욕에서는 Waldorf Astoria호텔, San Francisco에서는 Hyatt Regency호텔 및 동경에서는 New Ottani호텔에 투숙했다. 특히 동경의 New Ottani호텔의 건설 보고서를 입수하여 검토를 완료한 상태라, 그 호텔에서는 좀더 철저하게 여러 가지 점들을 검토했다.

   호텔 건설의 핵심은 해외 합작 회사 설립, 외자도입 및 기술 제휴인데, 그 중 외자 도입이  늦어 짐에 따라 호텔건설 사업 진행 또 한 늦어졌다. 호텔 부지의 매입 및 도심 재개발 사업의 추진을 위하여, 첫 개발사업부장으로 취임했다. 서울역 앞의 중구 양동에 Seoul Hilton호텔을 건설하려면, 서울 시청 앞의 프라자 호텔 건설의 예에 따라, 도심 재개발사업으로 추진하여야 했으므로, 그 계획부터 사업 승인까지를 맡아 처리하는 한 편 호텔이 들어설 토지의 일부를 매입 완료하였는데도, 호텔의 외자 도입은 확정이 되지 않아, 다시 부평에 있는 대우자동차 공장의 증축공사 현장 소장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사진은 제1회 대우개발주식회사 간부사원 교육 훈련이 경기도 여주에 있는 아카데미 수련관에서, 1979년 3월 24일부터 3월 28일까지, 4박 5일간 있었는데, 그 교육 훈련의 수료 기념 사진이다. 교육 중 수련생 대표직을 무난히 마쳤다. 나는 앞 줄 가운데에 완장을 차고 있다.

 

 

  1979년 9월13일부텨 9월 16일까지 3박 4일간 설악산의 뉴설악 호텔에서 열린 대우가족 임원 세미나에 참석하였다. 위의 사진은 제1차로 참석한 세미나 기념 사진, 분임 토의 장면 및 여흥 시간에 밴드의 반주에 맞추어 노래하는 모습이다. 전체 기념사진에서는 앞 줄 왼 쪽에서 네 번째에 앉아 있고, 분임 토의 사진에는 왼 쪽에서 두 번째에 앉아 있다. 어디에서나 장기 자랑에는 빠지지 않는 처지라 여흥 시간에도 노래를 불렀다.

 

 

  1980년 5월 리비아 건설본부의 DC-5 AGECO사옥 건설 현장 소장의 발령을 받아, 리비아로 떠나게 되었다. 1980년 5월 13일, JAL 952편으로 오후 1시 15분 김포 공항 출발, 오후 3시 15분에 일본 동경 나리타 공항에 도착했다. 동경에서 일박하며, 해외에서 필요한 것들을 구입하고, 5월 14일 오후 10시 30분발 JAL 421편으로 영국 런던으로 출발, 다음 날 오전 7시 5분에 런던 히드로 공항에 도착했다. 일박 후 5월 16일 LN 103편으로 런던을 출발, 리비아 트리폴리에서 오후 9시 30분에 입국 수속을 마치고, 벵가지에 늦게 도착했다. 사진은 런던에서 동행한 박용운 이사와 같이 찍은 것이다.

 

  1980년 5월 16일 늦게 리비아 벵가지 건설본부에 도착 인사 후, DC-5 AGOCO사옥 건설 현장으로 와서, 5월 17일 오전 2시 경에 잠들었다가. 오전 6시에 기상, 현장을 돌아 보는 것으로 리비아 현장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틀 간의 업무 파악과 발주처 및 감독관실의 인사를 마치고, 5월 18일 전임 소장으로부터 현장 업무를 완전히 인수했다. 당시 본 공사는 수익성은 없어도 건축 공사 수주의 의미를 갖는 리비아 석유 회사의 사옥 신축 공사로 직경 80㎝, 길이 20m 의 현장 타설 파일로 지정공사를 하는 중이었다.

공사 진척은 계획 보다 늦어 져 있었지만, 발주처와의 계속되는 파일 단가의 조정, 설계자와의 설계변경 및 공사기간의 조정 등을 본부와 협의하에 하나하나 처리해 나갔다. 현장에서는 멀리 고국을 떠나서 열사의 나라까지 와서 고생하는 공사 근로자와 현장 직원들의 피나는 노력이 공사를 이끌어 나아 갔다. 사실 현장 공사 근로자의 고생을 이루 말 할 수가 없었다. 술도 없고, 여자도 없이 1년 간을 지내야 하니, 대개는 현장 도착 후 3개월 까지는 잘 지냈는데, 그 후에는 신경이 날카러워 져서 작은 일에도 신경질을 내고, 싸우는 일도 종종 있었다. 한 번은 목공들이 별일도 아닌 일로 일을 하지 않고 있어서, 그들을 식당에 모아 놓고, 마침 딸 연의가 서울에서, 편지 대신 보내온 녹음 테이프를 들려 주었다. 연의는 "열사의 나라 리비아에서 공사에 매진하시는 아빠가 진정한 애국자"라는 이 한 마디를 들은 목공들은, 자신들의 딸들도 같은 생각임을 인식, 즉시 현장에 복귀하여 더울 열심히 작업에 임하였다. 당시에 녹음 테이프로 주고 받은 음성 편지가 우리집의 가보가 되었다.

 

대우건설 시절 이야기1 여권

 1980년 4월 28일 발급된 위의 여권에는 제한이 많았다. 목적지 리비아와 경유지로 일본, 요르단과 프랑스가 명기되어 있었는데, 1980년 5월 리비아에 갈 때에 영국 런던을 경유 했었다.

 그런데 1981년 2월에 이태리 베로나로 출장을 갈 일이 생겨서, 밀라노 공항 입국시에 위의 여권의 경유지에 이태리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입국 거절을 당했다. 당시 출장은 베로나의 Fenzi라는 알미늄 사시 공장의 바이어로 가는 출장이라서, 공항에서 베로나 공장으로 전화를 하여 공항 담당자와 통화를 하게 하였다. 담당자는 밀라노 한국영사관에서 경유지를 추가하는 조건으로 입국을 허락했다.

 밀라노 영사관에서 1981년 2월 17일 영국, 서독, 이태리, 그리스 등의 경유지를 추가하고, 베로나에서의 출장을 잘 마치었다.

 그 이후 여권에 경유지가 없어지고 여행 제한 국이 명기되고, 지금은 제한이 없는 여권이 발행된다.

 

  현장의 공사진행 상황 보고용 사진을 칼라 사진으로 현상을 하여 제출하려면, 현지의 사정상 1주일 이상 걸리므로 현장에서 흑백 사진을 촬영, 현상, 인화하여 제출하기로 합의했다. 현장의 한 곳에 암실을 만들고, 현상과 인화를 하는 기구 및 약품들을 구입 직접 촬영, 현상 및 인화를 하여, 공정 사진을 제 때에 제출했다.

  위의 좌측 사진은 1980년 12월 31일 종무식 사진이고, 중간 사진은 종무식 때 공로 근로자 표장 장면이며, 오른 쪽 사진은  1981년 4월 9일 현장 직원들과 생일 케익을 자르는 장면이다.

 

  1981년 10월 23일 금요일, 현장 공정이 지상 골조 공사 중이라 휴일을 이용하여 모처럼 리비아의 유명한 유적지인 알 베이다 근처의 시레네 유적을 찾았다. 그리스 유적을 비롯하여 로마 유적에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신전 유적, 원형 극장 유적, 목욕탕 유적 등 넓은 지역에 걸쳐서 그 많은 유적 중의 일부는 이태리 점령시에 이태리로 반출되었다고 했다.

 

  1982년 후반에 건물의 골조공사가 완료되고 나니, 이 건물이 벵가지 시의 제일 높은 건물이 됨과 동시에 랜드마크가 되었다. 따라서 현장을 방문하는 내빈들도 많아 졌는데, 그 중에는 당시 한국 주 리비아 대사님도 계셨고, 현지 공무원 중에는 벵가시시 도시계획국장 등 도시계획 관계자는 수시로 찾아 와서 옥상 층에 올라 베가지 시내 전역을 돌아 보는 일이 많았다.

 

  해외 현장 생활이라는 것이 어려운 것은 공사 그 자체의 기술적인 문제 보다는 현장 근로자 및 현장 직원들의 정신적인 문제의 해결이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현장에서는 말 못할 벼라 별일들이 생겨서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항상 상담을 하는 일이 많았다. 또한 단체로 여가 선용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어야 했다. 현장에서 근로자들을 위한 장기 자랑을 한다던가, 직원들의 현장간의 운동 시합이라던가, 직원 개인의 휴일의 취미 생활의 권장 등이 반드시 필요한 사항들이었다. 이는 곧 안전사고의 감소로 이루어 져서, 공사진행의 향상을 도모할 수 있었다.

 

 

  연호의 서울사대부국 졸업식 사진이다. 아빠가 리비아에서 근무 중에 맞는 졸업식이라, 큰 형수 부용당님, 작은 형수 추혜당님께서 참석하셔서, 아빠 대신 축하해 주셨다.

  현장의 골조 공사를 끝내고, 외장 및 내장 공사를 위해서는 공사용 자재의 조달을 위하여 자재의 수입선인 유럽의 여러 나라를 출장 다녀와야 했엇다. 사실 리비아에서 생산되는 건축자재는 골재와 시멘트 이외는 없었으니 말이다. 외장의 중요 부분인 알미늄 카튼월은 이태리의 베로나에 있는 Fenzi 공장에서 실물 시험을 발주처의 감독관과 같이 참석해야 했다.

 외장인 알미늄 카틑월 공사를 거의 완료할 지음, 리비아의 지도자인 가다피 위원장이 벵가지를 방문하여, 랜드마크가 된 건물을 보고, 아랍걸프오일회사(AGOCO) 본사 건물이 베가지에 있는 것보다는 오일 생산 현장에 있어야 한다고 지시함에 따라, 건물의 용도 변경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호텔로 용도가 확정됨을 계기로 현장을 후임자에게 인계 후, 리비아 본부의 건축 담당 임원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리비아 본부 건축 담당 임원으로 근무를 포함하여, 44개월의 리비아 근무를 마치고, 서울 본사로의 전근 명을 받았다. 당시 임원이 해외 근무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 올 때에는 김우중 회장의 배려로, 부인을 리비아로 초청하여 같이 리비아현장을 돌아보고, 유럽 몇 나라를 여행한 후 귀국하게 되어 있었다. 그에 따라 나도 1983년 9월 말경, 아내를 리비아 현장으로 초청을 하여 같이 귀국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해외 여행이 자유롭지 않은 시기라, 아내에게는 생애 첫 해외 여행이 되는 것이며, 가장 흥분되는 시간이 였을 것이다.

  아내를 맞기 위하여, 벵가지에서 리비아 수도인 트리폴리로 가서, 대한항공으로 도착한 아내를 공항에서 만나 트리폴리 본부의 캠프에서 1박 후 다음 날 국내선으로 벵가지로 와서 본부 캠프에 짐을 풀었다. 현장을 돌아본 후, 알베이다 근교의 유적인 시레네 유적, 사막의 토목 현장을 돌아보았다. 다시 트리폴리로 와서, 홈스 및 사브라타 유적들을 돌아보고,  약 일주일간의 부부 리비아 여행을 마치고 리비아 항공으로 그 동안 정이 많이 들었던 리비아 땅을 떠나 영국의 런던으로 향했다.

  런던에서는 런던 사무소의 후배의 영접과 안내로, 런던 및 근교의 며칠간의 여행을 마치고, 파리로 왔다. 파리에서는 파리 사무소 직원의 안내를 않받기로 했다. 며칠씩 우리 내외를 위하여 시간을 내주면 근무에 지장이 있음을, 내가 리비아에 근무한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파리에서 우리 부부만의 자유로운 여행 중에 루브르 박물관을 관람 후 잠시 앞 뜰에서 쉬고 있는데, 우리가 한국인임을 알고 우리 부부에게 인사를 건네는 분을 만났다. 그 분은 서울의 명문 의대의 교수로 파리에서 열리는 의학 세미나에 참석하셨다가 혼자서 관광 중, 우리 부부를 보고, 어떻게 부부가 여행을 할 수 있었는지, 부러워 하셨다.  기념으로 같이 사진을 찍고 서울에서 보기로 하고 헤어졌다. 사실 부부가 함께 여행을 한다는 것이 당시에는 불가능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항공권의 경유지를 두 곳을 추가하고, 비엔나, 쥬리히, 로마, 방콕, 싱가포르 및 동경을 경유하여, 약 한 달 간의 여행을 마치고 귀국했다.

 

가는 도시까지는 도착 국가의 항공기를 이용하고, 항상 첫 항공기로 목적지에 도착, 공항의 안내소에서, "Down town hotel, under $50-, near tour center!"로 호텔을 정하고, 시내의 관광 안내소에서 현지의 패키지 투어로 그 도시 및 근교를 여행할 수 있었다. 리비아에서 떠날 때의 항공권이 리비아 항공에서 산 항공궈이라, 경유지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Open 인 아주 조건이 좋은 항공권이기 때문에, 도착 후 다음 도시까지의 예약이 아주 쉽게 이루어 질 수 있었다. 따라서 예정 보다 더 많은 곳을 여행하게 되어, 서울로 돌아 오는 날이 예정 보다 훨씬 늦어 지게 되었다.

 

 

  1984년 2월 아들 연호의 삼선중학교 졸업식과 딸 연의의 사대부국 졸업 사진이다.

  내가 리비아에 근무하는 동안, 국민학교 학생이었던 연호가 사대부국을 졸업하고, 삼선중학교에 입학, 3년간의 중학교 과정을 마치고, 삼선중하교를 졸업하게 되고, 연의는 사대부국을 졸업하게 되었다. 정말 오래간만에 온 가족이 모여 연호와 연의 의 졸업을 축하했다. 특히 사춘기를, 아빠를 멀리 리비아에 보내 놓고, 엄마와 누이동생 연의와 같이 꿋꿋이 이겨 나가, 훌쩍 큰 연호의 모습은 대견하였다. 또한 우리 딸 연의의 귀여운 모습은 지난 리비아 현장에서 근로자들에게 들려 준 "열사의 나라 리비아에서 공사에 매진하시는 아빠가 진정한 애국자"라는 음성 편지를 생각나게 했다.

  졸업식 며칠 뒤인 1984년 2월 29일, 약 7년 간의 대우인의 생활을 마쳤다. 이는 나에게도 25년 간의 월급쟁이 생활을 졸업하는 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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