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주택은행 시절

1967-1977

 

 1967년 7월 10일 한국주택금고가 설립되어 본점 기술부의 참사로 발령을 받았다. 당시 한국주택금고의 본점은 관철동에, 기술부는 명동의 건물을 임대하여 사용하였다. 한국산업은행 주택과의 기술직원은 모두 한국주택금고 기술부로 자리를 옮겨서 선 후배 간의 유대는 그대로 유지되어, 근무 분위기는 아주 좋았다. 업무 역시 지난 한국산업은행 주택과의 기술업무를 확대한 것에 지나지 않아 어려움이 없었다.

 

 

 

   1967년 10월 28일 아버님께서 9년 여의 칩거 후에 돌아 가셨다. 5일 장을 치르는 동안 종로4가 집에는 많은 문상객이 다녀 가셨는데. 그 중에는 한국주택금고 개점이후 처음 맞는 책임자의 친상이라 김진흥 행장을 비롯하여 모든 임원이 다녀 가셨다.

  아버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어머님을 비롯하여 다섯 아들들과  두 며느리들에게 당호(堂號)를 내리셨는데, 어머님께는 여경당(餘慶堂), 큰 형님께는 소석(素石), 둘째 형님께는 목부(木夫), 셋째인 나에게는 추정(秋汀), 넷째 아우에게는 천강(千岡), 다섯째 아우에게는 적수(滴水), 큰 형수님께는 부용당(芙容堂) 및 작은 형수님께는 추혜당(秋蕙堂)이라고 내려 주셨다. 당호를 받은 우리들은 그 후부터 그 당호를 서로간에 부르게 되었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이후에 결혼한 셋째와 넷째 며느리들은 아버님의 당호를 내려 받지 못하였지만, 결혼 후에 아버님의 외사촌 아우이시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장을 역임하신 동양화의 대가이신 현초 이유태(玄艸 李惟台) 화백께서 당호를 내려 주셨는데,  셋째 며느리인 아내에게는  수죽당(脩竹堂) 및 넷째 며느리에게는 청오당(靑梧堂)이라고 내려 주셨다. 이유태 화백께서는 우리나라 지폐 1,000원권의 퇴계 이황선생을 그리셨다.

  아버님께서 당호를 내리시며 다섯 아들들에게는 사(思)자를 돌림으로 하는 자(子)도 함께 내려주셨는데, 나에게는 사륜(思侖)이라 주시며, 관명(官名)을 대신하여 쓰는 것이라고 하셨다. 따라서 나의 官名은 鄭建植이고, 子는 思侖이고 號는 秋汀이다.

  위의 사진은 아버님의 장례를 마치고 장지인 원당의 선형에서 찍은 것인데, 앞줄 왼쪽부터 작은 형님 木夫어른, 나 秋汀, 큰 형님 素石어른, 막내 아우 滴水 및 넷째 아우 千岡이고,  뒤 줄 왼쪽이 작은 형수님 秋蕙堂이시고, 오른 쪽이 큰 형수님 芙容堂이시다. 오른 쪽의 사진은 친구들인데, 왼쪽의 친구는 지금 미국에 살고 있고, 오른 쪽의 친구는 공군사관학교에서 전투 조정사의 꿈을 키우다가 공사 럭비 선수로 활약 중 부상으로 조정사의 꿈을 접고 공군 장교로 근무 후 전역을 하였다.

 

한국주택은행 시절 이야기1  堂號풀이

  아버님께서 어머님과 다섯 형제 및 두 며느리에게 내려주신 堂號와 이유태 화백께서 두 조카 며느리에게 내려주신 堂號를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어머님의 堂號인 餘慶堂은 "앞으로 경사스러운 일만이 남아있다"는 뜻이고, 큰 형님 내외분의 堂號인 素石과 芙蓉堂은 "집안의 근본이 되는 거대한 반석 위에 탐스럽고 영화로운 연꽃이 피어있다."는 뜻이고, 작은 형님내외분의 堂號인 木夫와 秋蕙堂은 "큰 뜻을 품고 낙향하여 시절을 기다리는 대장부가 가을 이슬을 머금고 피어있는 국화 한 송이를 꺾어 가지고 있다."는 뜻이고, 셋째인 우리 부부의 堂號인 秋汀과 脩竹堂은 "고요한 가을 호수 가에 절개의 상징인 푸른 대나무 숲이 빙 둘러있다."는 뜻이고,  넷째 아우부부의 千岡과 淸梧堂은 "천군 만마를 이끄는 장군이 전투에서 오동나무로 만든 지휘봉을 손에 들고 있다."는 뜻이고, 滴水는 "작은 물방울이 모여서 큰 바다를 이룬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1968년 4월 29일 서울 YWCA 강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신부 손정자는 작은 형수님의 소개로 알게 되어, 교제 끝이 평생을 같이 하기로 한 것이다. 결혼식의 주례는 초대 한국주택금고 김진흥 행장님께서 맡아주셨다. 32년 동안을 총각으로 연애 한번 제대로 못한 주제라 작은 형수님이 발을 벗고 나스셔서 당신의 과거 직장 동료의 여동생을 나에게 소개하여 주어, 처음 명동의 다방에서 만났는데, 첫 인상이 조금 매섭게 생겨서 나 같이 무른 놈에게는 딱 맞는 배필 감이라고 생각이 되어 교제를 하게 된 것이다.

   

 

장인 장모님이시다.

  충청북도 영동의 같은 마을에서 자라서 인연을 맺으시고, 네 아들과 세 딸, 일곱 남매를 두셨는데, 아들 딸을 번갈아 3년 터울러 보셨다. 집 사람은 둘째 딸로 위로는 오빠 두 분과 언니 한 분을 두고, 아래로는 남 동생 둘과 여 동생 하나를 두고 있다.

  장인 어른께서는  인천에 있는 동일방직에 근무를 하시다, 6.25동란을 맞아 공장의 시설과 가족 모두를 안전하게 피난시키시어, 동란 통에 가족의 사고를 당하지 않은 가정이다. 동일방직을 퇴직하신 후 서울 종로5가에서 회사를 운영하셨는데, 집 사람이 결혼 초에는 종로4가 집에서 살고 있어 가끔은 장인어른의 회사로 찾아가서 신혼의 어려움 등을 상의할 수가 있었다.

  장모님께서는 아담한 체구에서 어떻게 그러한 능력이 나오는지 궁금할 정도로 활동적이시고, 매사에 긍정적이신 분으로, 내가 당신의 둘째 사위가 되는데 일동공신이시다.

 

  1969년 4월 3일 한국주택은행 대구지점 기술역으로 근무 중 우리 부부 사랑의 결실로 첫 아들을 대구의 동산병원에서 보았다. 대구에서 자리를 잡아 살던 고교 동문인 마종철군의 부인이 산실을 같이 지키며 건강한 아들과 산모를 맞았다.   첫 아들의 이름은 이유태 화백께서 돌림 자인 연(然)에 호(昊)를 붙여서 연호(然昊)라 지어주시었다.

 신혼 시절이라 대구의 약전 골목의 방 두개짜리 전세방 살림을 했는데, 병원에서 퇴원을 한 연호를 안고 있는 모습이다. 대구에서 신혼 살림을 할 때인데, 하루는 소고기 한 근을 사서 로스구이를 안주 삼아 소주 반 병을 둘이서 나누어 마시고 반 병이 남아, 다음 날 퇴근 후 저녁 식사시 나머지 반 병을 찾았더니, 낮에 일 집안일을 하다가 목이 말라서 마셨다고 하여, 아내 수죽의 술 실력에 놀랐다. 나는 술 실력이 시원치 않았다.  하긴 결혼 직후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하는 자리에서 스스로 정종 주전자를 먼저 들고 친구들의 잔을 가득 채워 준, 술에는 일가견이 있는 아내였다.

 

 

  연호 100일 사진이다. 내가 항상 지갑 속에 넣고 다녔던 사진이다.

  대구 지점에서의 근무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 와서는 우선 동대문구 이문동에서 셋방살이를 잠시 하다가, 주택은행에서 장기 주택 자금을 융자 받아, 성북구 정릉동 의 동방 주택 단지에 주택을 손수 설계하여, 지었다. 그 주택의 상량식 때에는 온 가족이 주택의 신축을 축하 하였다.한국주택은행의 규정상 20평이상의 주택은 융자가 되지 않아, 1층을 20평으로 짖고 다시 1년 후에 2층을 17평으로 증축을 하여 완성한

주택이다. 외벽을 흰 색으로 칠한 집이라 우리는 이 집을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고 불렀다. 손수 설계를 하여 처음 지은 집인데, 앞에서 보면 2층이 더 커 보이는 특이한 설계의 집이라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었고, 높은 곳에 있어서, 멀리서도 흰 집이 잘 보였다. 한국주택은행을 퇴직하기 얼마 전까지 살다가, 낮은 곳인 정릉동 414-5호의 한옥으로 이사를 했다.

 

  1969년 4월 21일 한국주택은행 중부지점 개설준비워원으로 발령을 받아 서울에서의 생활을 다시 시작, 중부지점을 5월 27일 개점하고 기술역으로 근무중, 대구지점 근무시 신설 은행으로 예금유치 차원에서 처리한 건이 모종의 정치적인 사건에 연루가 되어,대검 중앙수사부의 조사를 받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하여 1970년 3월 1일부터 1971년 휴직, 1년후 1971년 3월 1일 복직하여, 당시 한국주택은행의 출자 회사인 한국주택개발주식회사에서 기술역으로 다시 근무했는데, 이 회사에서는 당시 처음으로 발행한 주택복권을 판매하고 그 수익금으로 무주택자를 위한 주택을 지어 분양하는 업무를 담당하였었다. 대표적인 아파트는 서울 동부 용산구 이촌동의 "복지 아파트"이고 단독 주택으로는 수원시 세류동의 주택 단지와 부산시 수영구 민락동의 주택 단지 등이었다. 1976년 8월 7일 한국주택은행 서무부 영선과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지난 날의 명예를 회복했으므로 마음 놓고 전직을 생각하게 되어, 당시 중동 특수로 인재가 필요한 건설회사로 가기 위하여, 1977년 4월 25일, 10년 간을 근무한 한국주택은행을 퇴직했다.

  퇴직하기 얼마 전 기술부장님의 추천으로 새로 설립되는 삼성건설에 면접을 보았는데, 국책은행의 영선과장으로 탄탄한 직장을 고만 두고 새로운 건설회사로 오려는 이유에 대하여, "나  자신을 시험하기 위하여"란 대답을 했다. 또한 대학동문이 추천하여 미륭건설의 회장님을 직접 면담한 자리에서 내가 건설회사의 경험이 없다고 하니, 오히려 회장님께서는 "잡다한 그림이 그려진 도화지 보다는 깨끗한 도화지를 원하다"는 말씀을 하셨다.

  사진은 연호가 4세, 1971년 11월 3일 서울 이대병원에서 출생한 딸 연의가 2세 때, 인천 만수동에 있는 외할아버지의 묘에 온 가족이 한식 성묘를 갔을 때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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