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은행 부산지점 시절

1964-1967

 

  사병으로 만기 제대 후 산업은행에 복직하여, 잠시 제3금융부에 근무하다가 부산지점으로 전근이 되어, 다시 부산에서의 생활을 피난시절과 이등병 시절에 이어 세 번째로 하게 되었다.

  피난 생활이나 군대 생활이 아닌 직장인으로의 생활이라서 우선 하숙집을 구했는데, 위치가 피난 학교가 있던 보수산 아래인 보수동이어서 걸어서 산업은행 부산지점이 있는 동광동까지 출 퇴근을 하였다. 지점에서의 업무는 주택자긍 대출에 따른 기술업무를 담당하였다. 군 복무 전에는 주택 자금이 ICA원조자금이었는데, 군 복무 후에는 국가 지원의 민영 자금이었다. 군 복무 동안에 주택 자금원이 변한 것이다.

  변한 것은 그 뿐이 아니다. 친구 중에 총각은 결혼을 하고, 결혼을 한 친구는 자식을 보았다. 당시 부산 역이 초량에 있어서 근무하는 상업은행 부산지점과 멀지 않아, 출장을 오는 친구들 마다 기차로 역에 내려서는 나를 찾아 왔다. 퇴근 후 출장 온 친구와 같이 지점의 큰 길 건너에 있는 현대 극장 옆의 광일 상회에서 정종과 각종 안주로 한 잔하고, 2차로 창선동이나 남포동의 스탠드 바에서 맥주를 마셨는데 당시 스탠드 바에서는 맥주가 고작이 었고 그 값은 맥주 한병에 500원씩이 었다. 장가를 간 친구는 친구의 권유로, 장가를 가지 않은 총각 친구는 나의 권유로 2차를 가게 되니, 항상 2차까지 갔었다.

  은행에서는 기본급을 매월 21일에 받았고, 각종 수당은 말일에 받았다. 따라서 친구들에게 술 대접을 할 때에는 1차는 현찰로 지불하였지만, 2차는 항상 외상을 했는데, 술 외상 값을 직접 찾아가서 갚았다. 1일부터 20일 사이의 외상 값은 21일에, 22일부터 말일 전 날까지는 매월 말일에 반드시 갚았다. 직장으로 외상 값을 받으러 오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외상으로 술을 마신다는 것이 술을 많이 하지도 않는 나의 정서에 맞지가 않아서 주머니에 돈이 생기는 날에 직접 찾아 가서 외상 값을 갚으니 2차 술집에서는 항상 나를 반겼다.

 

 

 1965년 4월 20일 아버님께 어려운 첫 편지를 주셨다. 사실 아버님께서는 1954년 덕성여대 교수로 재직 중 대광고등학교 근처의 친구 분 댁에 들르셨다가 저녁 식사 후 돌아 오시는 길에 약주도 안하시는 분이 개천으로 낙상,대퇴골의 골절상을 입으시어, 첫 번째 정형외과 수술이 마음에 안드신다고, 재수술을 완벽하게 하도록 다른 병원에서 받으셨으나, 골수염으로 진전이 되어 몇 차례 수술 후 집에 칩거 중이 셨다.

  작은 형수님을 보시는 흐뭇한 마음과 함께, 당신이 드시고 싶으신 젓갈류를 부탁하신 글이다.

 

  한국산업은행 부산지점에서 기술직으로 근무하며, 바쁜 날들을 보냈을 뿐 아니라, 평생 처음 하는 하숙생활에서 하숙방의 통풍이 좋지 않아 건강검진에서 폐결핵의 징후를 발견하고, 즉시 하숙방을 영주동의 산 위의 공기 좋고 통풍 잘 되는 여관으로 옮기며, 이 사실을 서울의 부모님께 알렸더니, 1966년 6월 19일 아버님께서 편지를 주셨다. 지금 보니 아버님의 너무나 자상하신 마음을 읽을 수가 있다.

  아버님께서 모처럼 셋째 아들에게 걱정이 되시어 편지를 보내는 봉투에 어머님께서도 위의 편지를 보내셨다. 어머님께서는 당시 집에서 오래 동안 칩거 중이셨던 아버님의 변한 모습과 가족들의 소식을 전하셨다. 1967년 봄에 어머님께서는 직접 부산에 놀러 오시기도 했다.

  아버님께서 1964년 6월 19일 보내신 편지 봉투의 앞 뒤 면이다. 당시 보통 우편 요금이 7원 인 것을 알 수 있다. 등기 우편 요금은 10원이었다.

 

 

  아버님께서 1967년 3월 11일 주신 편지이다. 한국상업은행에서 관리하던 민영 주택기금을 확대하여, 한국주택금고가 생기고, 기술직은 신생 은행으로 가게 되니 객지에서 몇 달만 더 고생하라는 말씀과, 집안의 첫 손자를 보시고 기쁜 마음, 큰 형님의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생일 잔치를 연기하여야 하는 사정 등을 주셨다.

 

 

1967년 3월 11일 보내 주신 편지 봉투이다. 아버님께서는 1936년 제4회 개인사진전을 끝으로, 사진가에서 서예가, 말 년에는 고고학자로 대학 강단에 스셨다.

  여기 올린 편지는 아버님의 서예가로서의 가치를 갖는 펜 글씨와 붓 글씨인 것이다.

 

  잘 나가는 서울 총각이 한국산업은행 부산지점에 근무를 하니 알게 모르게 유혹도 많았고, 격려도 많았다. 친구들을 좋아하다보니, 친구 둘이 같은 날 서울에서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을 해운대로 왔는데,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한 내가 그 신혼 부부 두 쌍에게 남포동의 "Giant"라는 스탠드 바에서 아가씨들과 같이 맥주를 대접한 것은 지금도 가끔 이야기거리가 되곤 한다.

  그래도 아무런 일 없이 1967년 한국주택금고가 생길 때까지 한국산업은행 부산지점 근무를 잘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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