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 고등학교 시절

1949-1955

 

 

 

  1949년 7월부터 서울대학교사범대학부속중학교 학생이 되었는데, 학제가 변경이되어 1950년 4월1일에9개월만에 2학년에 올라,

모처럼의 중학교 생활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2학년때에 6.25동란을만났고, 부산으로 피난을 가서 보수산에 있는 피난학교에서 1952년 3월 29일 중학교를 졸업하고,

1952년 4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피난시절 살던 부산의 남부민동 집의 울담을 배경으로 찍은 고1때의 모습이다.

 

피난시절의 일기장 제1권

일기장 제2권

일기장 제2권 내부

고등학교 1학년 때 국어 선생님께서 일기를 써서 학교에 가지고 와서 검사를 받으라고 하셨다.그래서 일기를 할 수 없어서 쓰게 되었는데, 당시 살기 어려운 피난시절을 말해 주듯이 일기장을A4용지 만한 시험지(갱지)를 몇 장 겹쳐서 가운데를 실로 묶던가(제1권), 가는 철사로 묶어서(제2권)쓴 것이다. 지금도 보관하고 있는 일기장들의 제3권부터는 그래도 제대로 된 노트에 썼다.국어 과목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나로서는 일기를 쓴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부산 보수산의 피난 학교 판자교실 앞에서 친구 변호수군과 같이 찍은 사진인데 변군은 미국으로 유학을 간 후 지금 까지 연락이 없다.

  서울사대부속고등학교는 남녀 공학이었으므로 뒤에 여학생의 모습이 보인다.피난 집에서 학교 까지는 완월동, 충무동,국제시장을 거처서 보수동의 산을  한참 올라 가야되었으므로, 2년 8개월 동안을 자취생활을 했던 나는 지각하는 경우가 많아서 "지각 할로"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처음의 피난 학교에는 교실도 없어서 보수산의 나무에 칠판을 걸고, 산 비탈을 계단 모양으로 만들어서  그 위에 앉아 책은 무릎 위에 놓고 공부를 하였다.

 

 

중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1   English Speaking Society

  부산으로 피난을 가면서 가지고 간 것이 바로 영어 단어 장이었다. 중학교 1학년 영어교과서인 National 의 Lesson One 은 This is a pen. 이다. 따라서 나의 단어 장에는 This부터 써있었다.

  피난 가서 자취를 하며 샘에서 물을 받는 동안에 할 일이라고는 단어 장을 보는 것이 고작 이었다. 한 단어 한 단어 외어가다 보니 쉬운 단어라 잘 외어 졌다. 동시에 영어에 흥미도 갖게 되어, 영어 점수도 올라갔다.

  어느날 6.25 전에 미국으로 가셨던 전형국 선생님께서 돌아 오셔서, 부산 보수산의 피난학교에서 영어시간에 축음기를 틀어 주셨는데, 본토 발음을 처음 듣게 된 것이었다. 링컨 대통령의 그 유명한 "Gettysburg Address"였다. "Four score and seven years ago,....."로 시작하여,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로 끝이 나는 연설이었다. 중학교에 들어와서 영어를 배우고 처음 들어 보는 현지인의 발음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나에게는 아주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래서 지금도 처음 구절을 외우고 있다.

  고등학교 2학년으로 올라 오면서, 영어과목을 중학교 1학년 때 가르쳐 주셨던 김성규 선생님께서 맡게 되어, 중학교 1학년의 좋지 않았던 영어 점수를 만회라도 하려는 듯 열심히 단어를 외웠다. 그러다가 여를 방학을 맞게 되어,  선생님께서 방학 동안에 보수산 천막 교실에서 English Speaking Society 라는 영어 회화반을 여셨다. 그 때에 2학년 학생 10명 정도가 참석했는데 여학생이 남 학생 보다 한명정도 많았던 것 같다. 첫째 시간은 영어잡지인 Newsweek의 한 테마를 가지고 공부를 했고, 둘째 시간에는 한 학생씩 돌아가며 사회자가 되어 영어로 리드를 하는 것이었다. 매일 Newsweek의  테마를 예습하지 않으면 안되는 형편이었다. 하루는 변호수군이 느닷없이 미군 병사 한 명을 영어 회화 반에 데리고 와서 그 미군 병사가 처음부터 Newsweek의 한 테마에 대하여 질문을 하는 것이었다. 나도 어제 예습을 한 테마라서 내용은 다 이해하고 있는데, 그 병사가 본토 발음으로 나에게 질문을 하는데, 도무지 알아 들을 수가 없어서, 쩔쩔매고 있는데, 마침 한 여학생이 재치 있게 그 병사에게 질문을 하여, 나는 궁지를 벗어 날 수가 있었다. 정말 고마웠다.

그 후 서울로 환도하여 유엔학생부에서 활동을 하며, 고등학교 시절을 마쳤다.

지금 아무 어려움 없이 내 나름 대로 렌트카로 세계여행을 우리 부부가 할 수 있는 것은 중 고교 시절의 영어 공부 덕이 아닌가 생각한다.

 

 

부산 피난 생활이 시작된 것은 1951년 1월 중공군의 한국전 개입으로 국면이 변하여 남쪽으로 온 가족이 등짐을 지고 추운 겨울 바람을 뚫고 얼어 붙은 한강을 건너가면서 시작이 되어 용인, 대전을 거처서 부산까지 오게 된 것인데, 남부민동 천마산 밑의 두 번째 피난집의 마당에서 울담 너머로 멀리 바다가 보이고 남부민동 방파제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낚시질을 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왼쪽 담 위로 주인 집 아들의 얼굴이 보인다. 당시 나는 아버님과 작은 형님과 셋 이서 부산에서 생활을 하고,어머님과 큰 형님 그리고 넷째, 막내 동생 등 네 식구는 서울 집에 돌아 가서 살고

계셨다.부산 피난 학교가 서울로 올라 갈 때까지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나의 피난 학교는 보수산에, 둘째 형님의 피난 학교는 집에서 가까운 송도에 있어서, 아침밥은 내가, 저녁밥은 둘째 형님이 하기로 되어 있어서 자취를 하는 동안 수도시설이 없는 피난 집에서는 물을 샘에서 떠다가  먹었는데, 사진의 울담 바로 아래에 있는 샘에는 항상 처녀와 아낙들이 몰려있어서 내가 물을 뜨기가 어려워서, 한 밤중에 멀리 천마산에 있는 샘에까지 가서 물을 떠왔다.

 

  고등학교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여름 방학 중에 부산 피난 학교가 서울로 돌아와서 2학기부터는 용두동에 있는 서울 본교에서 수업을 받게 되었는데, 부산뿐만 아니라 각지의 피난학교에서 공부를 하던 옛날 친구들을  만나서 새로운 환경에서 특별 활동도하게 되어, 나는 UN학생부에서 활동을 하던 중 그해 인권선언일 기념행사를 마치고 교문 앞의 아치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인데 아치의 영문 중 DECLARATION 이 DECLARTION으로 되어있다.

 

 

 서울로 환도하여 내 집에서 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우선 온 가족이 무사히 다 모였다는 것이 축복이었다. 왼쪽의 사진은 고등학교 2학년 때의 독사진이고,오른쪽 사진은 고3때의 것으로 졸업앨범사진이다. 가운데 사진은 즐거운 마음으로 하교하는 모습이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된지 얼마 안되어서 서남표군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어 친구들과 환송기념사진을 찍었는데, 서군은 지금 MIT의 교수로 있다.

지금 사진에 있는 친구들 중에는 유명을 달리한 친구, 외국에서 살고 있는 친구, 서울에서 자주 만나는 친구, 한국에 있으면서도 한 동안 만나지 못한 친구도 있다. 당시 꿈 많던 시절 23명의 모습인데,사진의 가운데 줄 오른 쪽 끝에 내가 있다.

 

  고3 때 모처럼의 시간을 내서 친구 몇 명이 세검정에 놀러 갔다.

당시만해도 인적이 드물고 계곡의 물도 맑고,자두와 능금 과수원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찾았었다. 옷을 벗어 편안한 차림의 모습이다. 머리는 모두 짧은 머리형이고 계곡의 바위 위에 앉아있는 친구들의 얼굴은 역광으로 인하여 어둡지만 알아 볼 수는 있다. 나는 웃옷과 바지를 벋고 있다.

 

 

 

 

1955년 3월 10일 서울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졸업식을 마치고 역사를 가르치셨던 김성익 선생님을 모시고 친구들과 같이 용두동 교사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다. 김선생님께서는 고교시절 인기가 많으신 선생님들 중 한 분이셨으며, 그래서 인지 역사 점수는 좋은 편이었다.

용두동 교사는 1949년 중학교에 입학 때의 그 교사였는데. 교사의 뒤에는 선농단이 있다. 지금은 학교 부지가 모두 고급주택지로 변경되어서 선농단 만이 옛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김선생님 옆에 교모를 벗고 서있는 내 머리는 많이 자랐다.

 

  서울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제7회 졸업생으로 공등학교를 졸업한 동기생 중에서 서울대학교공과대학을 지원한 동기생들은 모두 17명이였는데, 입학시험을 치른 후 합격자 발표일에 지원자 17명이 모두 지원한 학과에 합격하여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서울공대 2호관앞의 잔디 밭에서 찍은 사진이다.

한 고등학교에서 10명이상이 서울공대에 지원하여 100% 입학시험에 합격한 예는 아마도 우리들이 처음이 아닌가 생각된다.

 

 

 

  단기4288(서기1955)학년도 서울대학교 입학식 날에 고등학교 동기생 7명과 광능으로 며칠간의 캠핑을 갔었다. 회비를 걷어서 동대문 시장에서 많은 것을 샀는데, 그 중에는 소주, 백알 등 술도 처음으로 샀다.

  즐거운 며칠간의 캠핑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기 전날 남은 술이 7병이 되어서 각자 한 병씩 마시게 되었는데, 입에 쓴 백알 대신 소주를 한 병 마시고 자다가 새벽에 작은 텐트 안에서 토하여 빨래하느라 늦게 서울로 왔다. 사진 속의 친구들 중 네 명은 미국에서 살고 있다.

 

중등학교 학적부는 신청을 하였는데, 제7회 남학생분의

학적부 원본을 찾지 못하여 올리지 못합니다

중학교 졸업장

고등학교 학적부 전면(성적 등이 기재되어있다)

고등학교 학적부의 뒷면(성격 등이 기재되어있다)

 

고등학교 3학년에 1년 개근상을 받았다

 

고등학교 졸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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